백미옥의 작품세계를 말하는데 우선 서양의 어법을 비켜가려 한다. 아주 오래 동안 평면작업에서 '현대'는 '평면성'이라는 화두에 묶여 지내왔다. '평면성'은 나름대로 평면작업에 접근하는 훌륭한 방법을 제공한 것이 사실이다. 작업을 하는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고, 새로운 미적 가치를 제공해왔다. 하지만 '평면성'의 논리를 비켜감으로써 편안하게 작품에 다가설 수 있다는 것과 새로운 접근방법을 드러낼 수 있다는 기대로 이 방법을 택하려 한다.
회화에서 '평면성'의 추구는 인격의 자아실현만큼 절실하고 고독한 정체성의 확인작업이다. 즉 작품의 정체성, 작업을 하는 작가의 정체성 그리고 크게는 미술의 정체성을 궁구하는 작업인 것이다. 이는 모두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에 대한 확인 작업이 한가지 해법만으로 해결되는 것을 아닐 테고 성장소설에서처럼 작가의 정신적 성장에 따라 그 양상과 접근방법이 다르기 마련이다.
경험적으로 보면 인격의 성숙에 따라 소유하는 쪽에서 버리는 쪽으로 선회한다. 이것은 과학적인 법칙이 아니라 삶의 연륜 속에 쌓여 가는 삶의 노하우 즉 '공존해야만 한다'는 생존의 근거를 터득한 것일 테다. 우리는 이 속에서 진정한 존재의 실감을 느낄 수 있다. 공준을 위해서는 '나'를 버려야 하는데 '나'라는 정체를 버리는 것 즉, 정체성의 확인을 다시 타자 혹은 밖의 세계로 해소시키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백미옥은 작품으로 그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전의 작품이 색채를 주된 언어로 이용해서 구성적인 작업에 몰두한 것이었다면 이번의 변화된 모습은 화폭 위에서 형상을 해체하고 그리고 작가로서의 정체를 확폭 위로 해소하여 정신적·물질적으로 자기 화업의 성장과정을 보여준다. 서두에 굳이 ‘평면성’을 피해가려 한다고 한 것은 그녀의 작업 목표가 미술작품의 본질에 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형상이 해체된 색채는 그 경계를 잃어버린 채 서로 겹쳐지고 흘러내린다. 더러는 긁히고 더러는 섞여서 외견상으로는 얌전하게 그려놓은 풍경을 분탕질한 느낌을 준다. 그 결과는 색채의 조화로운 배열도 아니고 그렇다고 감정의 노도를 보여주는 광폭한 손의 휘두름도 아니다. 그녀의 화업은 색과의 대결인데, 색에 대해 꾸준히 탐구해온 백미옥은 형상을 빌어 색채라는 조형언어를 구현하다가 이제는 형상을 버리고 색채자체로 밀착해간다. 여기에는 끊임없이 자신을 화폭에 밀어 넣는 작가의 예술적 신념도 함께 개입한다. 왜 이런 행보를 시작한 것일까? 이에 대한 설명이 이번 전시의 열쇠라고 파악된다.
이에 대한 단서를 얻기 위해서 다음 두 가지로 접근해보자. 첫째는 미술사의 기억 속에서 백미옥의 작품이 연관되어 있는 지점을 확인하고 둘째는 백미옥 작품 자체의 특징을 짚어보는 것이다.
첫째, 미술사적 기억을 더듬어보면 작품의 외견상으로 올오버 기법과 연결되는데, 무엇보다도 올오버 회화에서는 평면에 대한 고정관념을 넘어선다. 한정된 공간으로서의 평면은 화면 틀을 넘어 무한으로서의 확산을 보여주며 균질화된 화면은 무한으로의 비약을 더욱 보증해준다. 균질적인 화면은 단색만의 단조로뭉이 아니라 수없이 겹쳐져서 교차하는 색채들끼리의 무수한 관계가 동시에 소리를 낸다는 의미이다. 하나의 고정관념을 넘어선다는 것은 회화로부터 비롯되는 경험의 영역을 한차원 넓혀준다는 의의를 갖는다. 따라서 백미옥의 작품은 올오버 화면의 미적인 가치를 회상시켜주는 작업이다.
둘째, 그렇다면 이러한 기억을 되살리는 작가의 실제 작업을 어떠한가? 백미옥의 작업은 ‘염력念力’ 시리즈이다. 작품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그녀의 포부는 삶의 경륜 속에 쌓여있는 근성과 통찰력으로 세상사의 본질을 포착해내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직관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를 드러내는 도구가 색채이고 그 결과가 자신의 작업, 작품인 셈이다.
도구의 사용이 자유로워야 따라서 표현이 자유로운 법인데, 색채에 대한 탐구로 일관된 그녀의 화력에서 도구에 대한 숙련도는 신뢰감을 준다. 그렇다면 도구(색채)를 사용해서 드러내는 표현, 즉 작품의 표정이 어떠한가를 살펴야하는데, 작가의 작품에는 대략 두 가지 경향이 섞여 있다.
한가지는 색채가 흐르고 겹쳐져서 생생한 표정을 간직한 작품이다. 작가는 탄탄히 쌇아올린 색채의 층을 긁어서 색채층의 내력을 드러낸다. 이는 작가가 모든 색채가 드러나게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화면에 개입하고 있는 것인데, 이전의 작업은 형상을 통해 색채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번 변화된 작품에서는 색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각각을 발현시키려 하는 것으로 작가의 조형의지가 개입되고 있는 것이다. 즉 작가는 이전의 작품으로부터 화면 위의 분별(형상)을 해소하기는 했어도 그 양ㅇ상을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지가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다른 한가지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화면의 표정이 잦아드는 작품이다. 색채를 드러내기 위한 작가의 행위를 절제함으로써 화면 위의 색채는 대체로 켜켜이 쌓인 채로 남아있고 작가와 화면 사이의 거리는 제거된다. ‘행위의 절제’라기 보다는 화면위로 자신의 조형의지를 해소시킨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듯하다. 이는 색채 속에 형상을 해소하고 게다가 작가의 조형의지조차 화면위로 녹여내려는 작가의 조형적 신념으로 파악된다. 이쯤 되면 작가가 바라보는 지점이 드러나는데, 작가는 多元의 분별과 갈등이 해소되는 지점 즉 보다 성숙한 존재의 실감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조형적인 완성도는 앞으로의 작업을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고 이 방향이 바로 작업의 진행방향이 될 것이며 작가에게 주어지는 숙제인 것 같다.
모든 것이 해소된 지점에서 다시 작가는 그 내용을 전달할 조형적 어법, 즉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여유가 있으면 ‘탐닉’이 가능해지고, 절실해지면 ‘방법’을 궁구하게 된다. 백미옥의 이번 작품은 이전 작품의 경향에서 벗어나는 과정의 작품이라서 그런지 방법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냉철한 방법을 보여준다는 것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치밀하고 성실한 내력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고 궁극적으로 소통을 전제하는 작품의 완성도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막 변화된 행보를 시작한 백미옥의 작품에 대해서 미적인 가치의 평가는 이르다고 생각된다. 이번 전시는 자신의 변화를 알리는 작가적인 성실함과 앞으로 성취할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백미옥의 작품에 적용할 구체적인 비평적 방법론은 다음으로 미루고 싶다. ‘다음’을 말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작가와 작품읠 가능성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