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제목은 그림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우회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최소한으로만 암시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그저 그림이 그려진 순서를 표시한 것으로서, 그 자체로는 어떠한 내용도 지시하지 않은 제목도 있다. 대체로 극단의 형식주의 태도를 견지한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예를 제외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제목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최소한의 근거나 단서가 될 수 있다. 백미옥의 그림은 대략 염력(念力) 시리즈와 라이프 시리즈로 구분된다. 그 제목은 그림에 대한 일반론을 피력한 것이기도 하고, 작가 자신만의 회화적 근거를 밝힌 것이기도 하다. 이들 두 시리즈는 각자 독자적인 회화적 특수성을 견지하면서, 이와 동시에 그 이면에서는 서로 통하는 일관된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염력 시리즈
염력. 생각의 힘만으로 사물을 움직이거나 변형시키거나 나아가 그 성분을 변질시키는 일종의 주술 행위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이러한 주술력으로서의 의미와 기능을 부여하는 한편, 스스로는 그 비의적인 힘을 행사하는 주술사(呪術師)가 된다. 그러니까 자신이 그린 그림을 통해서 사람들의 의식을 움직이고, 느낌을 통해서 감동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내부로부터 그 감동의 계기를 발견하고자 한다. 따라서 주술은 작가의 외부와 함께 자기 내부를 향한 것이다. 어느 경우이건 이는 공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며, 작가는 재현적인 방법보다는 회화적인 방법을 통해서 이를 실현한다. 즉 작가의 그림에 적용된 염력이란 일종의 자기 내면의 무의식의 지층을, 무의식적으로 구축된 감수성을 끄집어내는 행위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여기에 회화적인 질감과 색채를 덧입혀서 조형화하는 것이다. 백미옥의 그림은 일견 추상표현주의 회화로부터 색면화파에 이르는 추상회화의 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격정적인 붓놀림이 여실히 드러나 보이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그 페이소스를 색면 속에 거둬들인 정적이고 관조적이고 명상적인 그림도 있다. 그런가하면 추상표현에서 표현은 페이소스와도 통하는 것으로서, 이는 삶의 질이 회화적 행위로 나타난 경우로 보여진다. 즉 회화적 행위란 일종의 삶의 메타포의 한 형태로서 주어진 것이다(회화의 행위는 무엇보다도 몸의 행위이다). 이를 위해서 작가는 화면을 중층화한다. 붓질을 하고, 여러 연장을 이용하여 그 붓질된 화면을 긁어내고, 또 그 위에 덧바르고 하는 식의 과정을 수 차례에 걸쳐서 반복하고 중첩시킨다. 이는 정해진 패턴과 순서에 따른 기계적인 과정이기보다는 우연성과 즉흥성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가급적 열어 놓는 식의, 유기적이고 돌발적이며 역동적인 과정을 따른다. 이로써 그림은 일종의 그리기와 지우기를 반복하는 역동적인 프로세스를, 일차로 그려진 이미지를 지우는 부정의 계기를, 그리고 이렇게 지워진 이미지의 흔적을 화면 위로 낱낱이 불러들여 되살려내는 긍정의 계기를 포함한다. 이렇듯 중층화된 회화의 지층은 자기 내부에 지우기와 그리기, 해체하기와 구축하기, 부정과 긍정의 역동적인 관계에 근거한 변증법의 회화적 메타포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회화의 지층은 삶의 지층과 겹친다). 이는 회화가 생산되는 과정을 가시화 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그 자체 조형적인 한 요소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최종적인 화면에서는 이러한 모든 역동적인 과정이 화면의 이면으로 가라앉고, 보다 정제된 정적이고 관조적인 명상의 계기를 열어 놓는다.
라이프 시리즈
라이프. 전통적인 회화의 문법 가운데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말이 있다. 그림 속에는 우주(대기)의 흐름과 하나로 통하는 생생한 기운이 깃들여 있어야 하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의 계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가운데 영어의 라이프에 해당하는 꺕?은 특히 그림이 살아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와도 같은 생명 현상이 느껴져야 한다는 말이다. 흔히 그림을 화가의 분신이나 혼에 비유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더불어 생은 회화의 궁극, 회화의 본질, 회화의 원형을 뜻하며, 이와 함께 작가의 개인적인 삶의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백미옥의 그림에 있어서 생은 살아 있는 그림을, 회화의 본질을, 삶의 메타포를 함축한다. 작가는 라이프 시리즈 역시 염력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형상이나 설명적인 방법에 기대는 대신, 추상적이고 회화 내적인 방법을 따른다.
작업은 크게 삼베 천을 일정한 크기로 자른 후 그 조각 천을 나무로 된 프레임 위에 고정시킨 것으로써 캔버스를 대체한 평면 작업과, 두루마리 삼베 천을 이용한 설치작업으로 구분된다. 처음에 작가는 일종의 즉흥성이나 우연성의 계기에 몸을 맡겨 자유자재로 화면에 붓질을 올리고, 또한 연장을 이용하여 이를 긁어내는 과정을 수 차례 반복한다. 그럼으로써 화면에는 회화의 지층이 드러나게 되고, 또한 화면 그 자체로서 어느 정도 물질감을 얻게 된다. 여기서 회화의 지층은 삶의 지층 혹은 그 과정으로서의 시간의 지층을 암시하며, 표면의 마티엘이나 스크래치가 그 삶의 과정에서 유래한 상처를 암시한다.
작가는 이렇게 드러난 중층화된 화면 위에 단색조로 덧칠을 한다. 이때 완전히 불투명한 색조로 화면을 덧칠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반(半)투명성을 견지함으로써 바탕 화면의 지층이 은근하게 드러나게 한다. 그 과정을 설명하자면, 아크릴 물감을 물에 풀어 가라앉힌 후, 그 위에 뜨는 투명하고 맑은 부분을 채취한 일종의 반투명의 안료를 이용하여 수 차례에 걸쳐 그 위에 덧바르는 식이다. 이렇게 덧바른 화면은 마치 속이 비쳐 보일 듯 일정정도 투명한 막을 형성하게 된다. 이는 색채에 대한 작가의 독특한 감수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서, 사실상 작가의 작업은 색채에 대한 감각적 사유의 결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다시 말해서, 작가는 원색을 사용할 때조차도 완전한 불투명의 원색을 피하고, 대신 투명하고 맑은 원색, 간(間)색, 쪽빛을 머금은 자연색에 가까운 색채를 선호한다. 여기서 색채가 자연에 가깝다는 말은 곧 그 색채가 인간 본연의 감수성과도 통한다는 말이다. 그런가하면 작가의 그림 중 특히 청,적,황,흑,백색을 적절히 운용한 그림에서는 오방(五方)색이 갖는 동양적 사유나 상징 체계를 느끼게 한다. 동양에서 오방색은 사실상 우주를 상징하며, 이는 이 오색에서 회화의 본질을 본 몬드리앙이나 청색에서 일종의 우주적 비전을 본 이브 클라인의 경우와도 통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에 있어서 색채는 하나의 논리나 의미를 위한 기호이기도 하고, 일종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경험을 위한 대리물로서 제시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히 간색에 연유한 은근하고 암시적인 감성이 자연발생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또한 작가는 삼베 천을 바탕재로 사용하는 데에 따른 상당한 재질감 즉 마티엘 효과를 얻고 있다. 알다시피 삼베 천은 그 올이 성글고 굵어 다른 천들에 비해서 그 씨실과 날실의 재질감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렇게 드러난 화면의 질감은 존재의 질감에로 증폭되고, 시지각적 대상으로서의 회화는 촉각적인 대상으로까지 전이된다. 이외에도 작가는 삼베 천의 가장자리를 올이 풀린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는가 하면, 또한 이렇게 풀린 올들 가운데 일부를 그대로 화면에 정착시키는 등 그 자체를 조형적인 효과로 포용한다. 그런가하면 올이 성글고 굵은 삼베 천의 특성상 그 위에 덧입혀진 안료가 표면에서 일정한 피막을 형성하기보다는 천의 내부로 침투하게 된다. 따라서 화면에서의 앞면과 뒷면과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게 되며, 이는 간색과 함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의 은근한 감성을 말해준다.
이렇듯 백미옥은 추상표현주의적 화면을 통해서 행위의 궤적과 함께 삶의 역동성을 표출시킨다. 그리고 보다 정제된 색면 그림에서는 그 페이소스를 그림 내부로 거둬들여 일말의 명상적이고 관조적인 계기를 열어 놓는다. 삼베 천에 그린 그림에서는 마치 모자이크 화면처럼 일련의 화면들을 한자리에 모아 배열함으로써 외관상 미니멀리즘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화면의 지층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간색이나, 화면의 내부로까지 침투하는 안료의 투명성과
투과성은 은근하고 암시적인 감수성을 드러내 보인다. 한편, 설치 작업에서는 화면 내에서 실현된 전면성이 화면 외부로까지 확장된다.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의 지평이 화면의 내적 논리를 묻는 것에서 화면과 공간과의 관계의 논리를 묻는 것에로 증대된다. 이 모든 회화적 성과들은 회화의 내적 논리를 표상하며, 그 회화의 논리 속에는 일종의 삶의 메타포를 내장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양적 사유와 감수성에 바탕을 둔 작가의 멘탈리티를 실현한 것이다.